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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다. 계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계단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도러시 E. 마클리, 1964년 3월 사임서 말미. 1996년 사후 유고에서 확인되었다.
1. 개요 [편집]
계단 계획(階段計劃, Project STAIRCASE)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의 비밀 초상 연구 조직 SIGMA가 시행한 강제 승급 실험이다. 이미 각성한 고위 능력자에게 약물 투여, 전기 자극, 장기간의 감각 박탈을 동시에 가하여, 당시 이론상으로만 상정되던 최상위 단계 — 오늘날의 6급 — 에 인위적으로 도달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세 명의 피실험자가 투입되었다. 두 명은 시행 도중 사망했고, 한 명은 능력이 폭주하여 시설 일부를 파괴한 뒤 영구 격리되었다. 계획은 1964년 3월 공식 종결되었으나 축적된 기록은 폐기되지 않았고, 이후 신비 연구의 여러 표준 절차가 이 계획의 부산물에서 갈라져 나왔다.
계단 계획이 초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성과가 아니라 오류에 있다. 계획은 능력의 강도가 오를 수 있는 단(段)의 연속이라는 전제 위에 세워졌는데, 이 전제 자체가 계측 이전 시대의 관찰 착오였다. 능력의 등급은 사다리의 칸이 아니라 한 능력자가 묶임으로 고정한 미시 물리량의 개수이며, 개수는 정수이므로 그 분포는 당연히 이산적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이 계단이라고 판독한 것은 오를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세어진 대상이 개수였기 때문에 생긴 눈금이었다. 계획은 이 오류를 세 사람의 몸으로 확인했고, 그 확인의 대가로 얻은 데이터가 역설적으로 오늘날 등급체계의 골격이 되었다.
이 문서에 인용된 자료는 모두 작중 세계에서 정식으로 봉인 해제되지 않았다. 계획의 존재를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1차 자료는 1988년 의회 감사 보고서 부록의 한 줄, 1996년 사망한 의무 책임자의 유고, 그리고 출처가 특정되지 않은 몇 편의 유출 사본뿐이며, 서로 어긋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아래 서술에서 수치와 날짜는 가장 널리 인용되는 판본을 따랐고, 판본이 갈리는 경우 그 사실을 함께 적었다.
2. 명칭 [편집]
2.1. 암호명 STAIRCASE [편집]
SIGMA는 1954년 이후 하위 계획의 암호명을 내용과 무관한 중립 명사에서 배정하도록 내규를 두고 있었다. 암호명이 계획의 성격을 암시하면 명칭 자체가 정보 유출 경로가 된다는 판단에서였고, 같은 시기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가 알파벳순 등록부에서 기계적으로 단어를 배정한 것과 취지가 같다.[1]
계단 계획은 이 내규의 예외였다. 계획을 제안한 SIGMA 이론분과의 시어도어 M. 홀브룩이 제안서에 직접 붙인 이름이 그대로 승인되었고, 운영위원회는 예외 허용의 근거로 "계획이 성공할 경우 명칭이 이론의 이름이 될 것"이라는 문구를 회의록에 남겼다. 3년 안에 결론이 난다고 보았기 때문에 명칭의 노출 위험을 감수한 것인데, 후대의 평자들이 이 계획을 두고 계획의 오만을 그 이름이 먼저 증언했다고 쓰는 것은 이 회의록 때문이다.
2.2. 번역과 표기 [편집]
루이나어권 문헌에서 이 계획이 「계단 계획」으로 옮겨진 것은 1980년대 이후다. 그 이전의 사본에서는 「층계 계획」이라는 번역이 쓰였고, 1974년 프랑스 남부 시설에서 유출된 교정쇄의 루이나어 중역본에는 「사다리 계획」으로 적힌 대목이 있다. 세 번역은 모두 STAIRCASE의 직역이지만 함의가 다르다. 층계와 사다리는 구조물을 가리키는 반면 계단은 그 구조물을 이루는 한 칸을 가리킬 수도 있어서, 피실험자를 각각 「제1계단」, 「제2계단」, 「제3계단」으로 불렀던 계획 내부의 호칭과 겹친다. 이 겹침이 우연인지 번역자의 의도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초상사 연구자들은 자료의 진위를 가릴 때 이 표기 차이를 단서로 쓴다. 1980년대 이후에 작성된 문서가 「층계 계획」이라는 표기를 쓰고 있다면 오래된 사본을 베낀 것이거나, 오래되어 보이려고 일부러 옛 표기를 택한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 유럽에서 돌아다닌 이른바 완본 사본 여러 편이 이 방식으로 위작임이 드러났다.
3. 배경 [편집]
3.1. 계측 이전의 초상 연구 [편집]
계단 계획을 이해하려면 이 계획이 계측 이전의 사업이라는 점을 먼저 짚어야 한다. 능력자의 뇌에서 발생하는 간섭장을 직접 측정하는 데 성공한 것은 1960년대 말이고, 간섭장 강도와 제어 물리량 수를 기준으로 한 SIGMA 척도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초다. 계단 계획이 시행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연구자들에게는 능력자를 숫자로 식별할 수단이 아예 없었다.
당시 능력자를 판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관찰로, 능력자가 일으킨 현상의 규모를 직접 기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가 계측이었다. 신비는 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며 보존 법칙 안에서 분포와 방향만을 바꾸기 때문에, 발동에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끌어온 대가가 따른다. 불을 일으키는 능력자의 주변 공기가 오히려 차가워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SIGMA의 계측반은 능력 발동 시점의 주변 온도, 전위, 기압, 가속도 변화를 정밀하게 기록하고 그 총량으로부터 능력자가 건드린 물리량의 종류를 역산하려 했다. 이 역산은 오차가 컸지만 방향은 옳았고, 실제로 훗날 SIGMA 척도가 채택한 제어 물리량 개수라는 기준은 대가 계측 방법론의 직계 후손이다.
3.2. SIGMA 프로그램의 확장 [편집]
1950년대 중반 섹션 그레이가 SIGMA 프로그램으로 재편되면서 미국의 초상 연구는 성격이 달라졌다. 그전까지의 연구가 현상의 실재 여부를 확인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면, SIGMA는 처음부터 운용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전국의 자연발현자 탐지와 등록, 인위적 각성 실험, 각성된 능력자를 군사 작전에 통합하는 교리 개발이라는 세 축이 동시에 굴러갔고, 예산은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다섯 배 이상 늘었다.
이 확장기의 특징은 성과의 비대칭이었다. 탐지와 등록은 예상보다 잘 굴러갔다. 반면 각성 쪽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소련이 1943년에 확립한 발현 훈련 방법론을 전후에 입수해 개량한 뒤에도, 훈련 과정을 거쳐 실전에 투입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는 비율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운영위원회 내부에서는 이 방식으로는 병력을 늘릴 수 없고 이미 가진 소수를 강화하는 쪽이 낫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계단 계획은 이 주장의 극단적 귀결이었다.
3.3. 6급 가설의 형성 [편집]
1959년 홀브룩이 운영위원회에 제출한 「불연속 각성에 관한 각서」는 계단 계획의 이론적 출발점으로 꼽힌다. 각서의 핵심은 전국 등록부에 올라 있던 능력자 1,140명의 관측 기록을 현상 규모의 로그 척도로 나열했더니 분포가 연속이 아니라 여섯 개의 군집으로 갈라졌다는 것이었다.[2] 군집 사이에는 관측 사례가 드문 공백대가 있었고, 홀브룩은 이 공백대를 문턱이라고 해석했다.
여섯 군집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각서는 여섯 번째 군집의 상한이 물리적 한계라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위에 관측되지 않은 일곱 번째 칸 — 각서의 표현으로는 최상단(the top step) — 이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각서는 이 단계의 능력자를 "조작 대상의 목록이 충분히 길어져서 사실상 국소적 물리 법칙을 다시 쓰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규정했는데, 이 정의는 표현만 다듬어진 채 오늘날 6급의 정의로 그대로 남아 있다.
계단 가설이 상정한 여섯 칸이 훗날 SIGMA 척도의 여섯 등급이 되었다는 사실은 초상사 서술에서 자주 지적되는 대목이다. 등급체계의 칸 수는 계측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폐기된 가설에서 물려받은 것이며, 계측은 그 칸에 사후적으로 기준을 채워 넣었을 뿐이다.
3.4. 소련 요인 [편집]
각서만으로는 계획이 승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1960년 가을 미국이 입수한 첩보였다. 동유럽 경유로 들어온 이 보고는 소련이 단계 도약에 성공했으며 기존 최상위를 넘어선 능력자 한 명을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첩보는 사실이 아니었다. 1970년대에 재평가된 바에 따르면 원 문건은 제14국이 아니라 소련 과학 아카데미 계열 연구소의 내부 보고였고, 문제의 표현은 특정 피험자의 출력이 이전 측정값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뜻이었지 등급의 도약을 의미하지 않았다. 번역 과정의 오류였는지 의도된 역정보였는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소련이 같은 시기에 강제 승급을 시도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으며, 소련의 관심은 오히려 능력자를 한계 너머로 밀어붙여 붕괴시키는 방향, 즉 1966년부터 시작되는 유폭 실험 쪽으로 이미 기울어 있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존재하지 않는 위협이 실재하는 계획을 낳았다는 구도는 이 시기 냉전 정보사에서 드물지 않다. 계단 계획의 경우 이 구도가 특히 선명한 것은, 계획을 중단시킨 것도 결국 소련이 아니라 계획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4. 계단 가설 [편집]
4.1. 불연속 각성의 관찰 [편집]
계단 가설이 당시 연구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현장의 경험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발현 훈련 과정의 교관들은 오래전부터 훈련생의 출력이 연속적으로 늘지 않는다고 보고해 왔다. 몇 달 동안 아무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칸 올라간 것처럼 달라지고, 그 뒤로 다시 오래 정체한다는 것이다. 자연발현자들의 증언도 비슷했다. 각성의 순간을 회고하는 진술은 거의 예외 없이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단절로 서술된다.
이 두 계열의 관찰을 합치면 능력이란 문턱으로 나뉜 층계이고 각성이란 문턱을 넘는 사건이라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홀브룩의 각서는 이 현장 감각에 통계적 외양을 입힌 것이었다.
4.2. 문턱과 도약 [편집]
가설이 실험 계획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몇 개의 추가 전제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첫째, 문턱을 넘게 만든 것이 자연발현에서는 극한 상황이나 외상이었으므로, 인위적으로 그와 같은 조건을 만들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전제다. 둘째, 문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으므로 아래쪽 문턱을 넘긴 방법을 강화하면 위쪽 문턱도 넘길 수 있다는 전제다. 셋째, 도약이 실패하더라도 원래 자리로 돌아올 뿐이라는 전제다.
세 번째 전제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계획 문서 어디에도 실패의 결과가 원상 복귀라는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전제는 계단이라는 은유에서 곧바로 따라 나온 것이다. 계단을 오르다 실패하면 원래 칸에 남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 상식과 전혀 달랐다.
4.3. 가설의 이론적 공백 [편집]
오늘날의 이론으로 보면 계단 가설이 비켜 간 지점은 분명하다. 능력의 강도를 결정하는 것은 능력자가 묶음으로 고정한 미시 물리량의 개수이며, 그 묶음은 한번 고정되면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이 반드시 하나의 능력만 가지는 것도, 능력이 특정 형태로 관측되는 것도 이 고정 때문이다. 따라서 등급을 올린다는 것은 어떤 문턱을 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묶음을 풀고 더 많은 요소를 포함시켜 다시 고정하는 일이다.
문제는 푸는 단계다. 묶음이 풀린 상태의 능력자는 더 강한 능력자가 아니라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닌, 제어되지 않는 미시 조작이 방향 없이 일어나는 상태가 된다. 그 조작은 가장 가까운 대상, 즉 능력자 자신의 신체에 먼저 작용한다. 계단 계획의 사망 사례 두 건이 모두 외부 피해 없이 피실험자 본인에게서 끝난 것은 이 때문이다.
또 하나, 군집 사이의 공백대가 문턱의 증거라는 해석도 뒤집혔다. 제어 물리량의 개수는 정수이므로 그 분포는 본래 이산적일 수밖에 없고, 현상 규모가 개수에 대해 급격히 증가하는 이상 군집은 필연적으로 생긴다. 계단은 있었다. 다만 그것은 오를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세어진 대상이 개수였기 때문에 생긴 눈금이었다.
5. 승인과 조직 [편집]
5.1. 1961년 2월 운영위원회 결정 [편집]
SIGMA 운영위원회는 1961년 2월 6일 제61-2차 회의에서 계단 계획을 승인했다. 결정번호는 SG-61-014이며, 승인 문안은 "최상단 도달 가능성에 관한 실증적 판단을 3년 이내에 제출할 것"이었다. 표결은 전원 찬성이었으나 회의록에는 두 건의 유보 의견이 기재되어 있다. 하나는 피실험자 확보 방식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 시 회수 절차가 계획서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두 번째 유보는 회의 말미에 "실패는 피실험자의 원상 유지를 의미하므로 별도 절차가 불필요하다"는 제안자 측 답변으로 정리되었다.
이 한 줄은 뒷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목이 되었다. 1988년 의회 감사에서 계단 계획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감사관이 부록에 남긴 문장은 "1961년의 위원회는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았다"였다.
5.2. 지휘 계통과 인원 [편집]
계획 책임자는 제안자인 홀브룩이 그대로 맡았다. 임상 총괄은 정신과의 필립 R. 앨콧, 의무 책임은 신경과 전문의 도러시 E. 마클리였고, 시설 보안은 육군 대령 하워드 T. 브리스코가 지휘했다. 운영위원회 측 감독은 위원장 에드거 S. 랜들이 직접 맡았는데, 계획의 보안 등급이 높아 중간 보고 계통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뒷날 내부 견제가 작동하지 않은 원인으로 지목된다.
계획에 투입된 인원은 연구, 의료, 보안, 시설 유지를 통틀어 누적 140명 안팎, 최대 동시 근무 61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계획의 실제 목적을 고지받은 인원은 9명뿐이었다. 나머지는 고고도 및 극한 환경 생리 연구의 일부라고 설명받았고, 상당수는 자신이 무엇에 참여하고 있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이 구획화는 SIGMA의 표준 관행이었지만 계단 계획에서는 부작용이 있었다. 사고 당시 대피 유도를 맡아야 할 경비 인원이 피실험자의 능력 계통을 몰라 엄폐 판단을 그르쳤다는 지적이 내부 조사에서 제기되었다.
5.3. 예산과 위장 [편집]
최초 배정 예산은 1961 회계연도 190만 달러였다. 계획 종료까지의 총 집행액은 610만 달러로 추정되며, 같은 기간 SIGMA 전체 예산의 4퍼센트 안팎에 해당한다. 예산 항목은 「고고도 생리학 연구」로 위장되었고, 집행 기관은 공군 항공의학연구소로 등재되었다. 1963년 사고 이후의 시설 복구 및 격리 비용은 이 항목에 반영되지 않았으며, 별도의 긴급 예비비에서 지출된 것으로 보이나 액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위장 항목의 선택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었다. 고고도 생리학은 저산소, 감압, 감각 차단을 실제로 다루는 분야였으므로, 계획이 구매한 장비 목록 — 감압실, 밀폐 탱크, 산소 조절 장치 — 이 항목과 모순 없이 맞아떨어졌다. 뒷날 이 위장이 뚫리지 않은 채 25년을 버틴 것은 이 정합성 덕분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5.4. 할로 크릭 시설 [편집]
계획의 시행 장소는 미국 서부 내륙 사막지대의 할로 크릭 시설이었다. 공식 명칭은 공군 기상중대 파견대였고, 지상에는 관측 장비와 막사 몇 동만 있었다. 실제 설비는 지하 3개 층에 있었다. 지하 1층은 관리와 계측, 지하 2층은 실험실과 감각 박탈 구역, 지하 3층은 의무 구역과 격리실이었다.
시설 설계에서 특기할 점은 능력자 수용을 전제한 구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격리실의 벽체 강화는 일반 구금 시설 수준이었고, 능력 발동을 억제하는 설비는 아예 없었다. 당시에는 그런 설비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 현재 4급 이상 능력자를 수용하는 시설에 상시 가동되는 능력 억제 장치가 계단 계획 이후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 계획이 남긴 것이 이론이 아니라 대응 설비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6. 피실험자 선정 [편집]
6.1. 선정 기준 [편집]
선정은 1961년 봄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1차 스크리닝에서는 전국 등록부의 1,140명 가운데 관측 기록이 상위 군집에 해당하는 인원 47명이 추려졌다. 2차에서는 연령, 기저 질환, 약물 반응 이력, 심리 검사 결과를 기준으로 12명이 남았다. 3차는 정밀 면담이었고 여기서 3명이 확정되었다.
선정 기준 목록은 마클리 유고에 여섯 항목이 남아 있다. 앞의 다섯은 능력 계통, 관측된 출력, 신체 건강, 심리적 안정성, 지시 순응도로 실험 설계상 당연한 항목들이다. 여섯 번째 항목은 "실종 시 추적 가능성이 낮을 것"이었다. 계획이 피실험자의 생환을 전제하고 있었다면 필요 없는 조건이며, 실제로 이 항목 때문에 2차까지 통과한 인원 가운데 가족 관계가 촘촘한 네 명이 탈락했다.
6.2. 동의 절차 [편집]
세 사람 모두 형식상으로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동의서는 연구의 목적을 "고강도 환경에서의 특수 재능 유지에 관한 연구"로 기재하고 있었고, 강제 승급이라는 말은 물론 사망 가능성에 관한 문구도 없었다. 보상은 일시금과 의료 지원, 그리고 가족에 대한 주거 지원이었다.
제3계단의 동의서에는 보호자 서명란이 비어 있고 대신 후견 기관의 직인이 찍혀 있다. 그가 국가 시설에서 성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인데, 이런 배경을 가진 인물이 우선 선발되는 관행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련 제14국의 능력자 상당수가 고아원이나 국가 시설에서 어린 시절에 선별된 인원이었다는 사실이 훗날 확인되면서, 냉전 양 진영의 초상 연구가 이 한 가지 점에서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6.3. 세 사람 [편집]
세 피실험자의 실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계획 내부에서는 각각 제1계단, 제2계단, 제3계단으로 불렸고 SIGMA 등록번호는 S-114, S-207, S-233이었다. 유출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몇 가지 신상 정보뿐이다.
제1계단은 시행 당시 28세 남성으로 열 계통 능력자였다. 등록부 분류상 위에서 두 번째 군집, 오늘날의 4급에 해당한다. 화재 현장에서 우연히 능력이 드러나 등록되었고, 등록 이후 4년간 관찰 대상이었다.
제2계단은 31세 여성으로 전기 계통이었으며 역시 두 번째 군집에 속했다. 세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발현 훈련 과정을 정식으로 이수한 인원이었고, 그 때문에 의식적 연산의 통제력이 가장 높다고 평가되었다. 제1차 시행의 실패 원인이 통제력 부족으로 분석되면서 이 평가가 선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제3계단은 24세 남성으로 벡터 계통이었고, 등록부에서 최상위 군집으로 분류된 아홉 명 중 하나였다.[3] 벡터 계통은 오늘날 각국이 가장 위험하게 분류하는 계통이며, 계획이 가장 귀중한 자산을 마지막 순서에 배치한 것은 앞선 두 차례의 실패로 남은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7. 프로토콜 [편집]
7.1. 기준선기 [편집]
모든 시행은 2주간의 기준선기로 시작했다. 피실험자를 시설에 수용하고 통제된 조건에서 반복적으로 능력을 발동시키면서 대가 계측을 수행하는 단계다. 온도, 전위, 기압, 국소 자기장, 가속도의 변화를 동시에 기록해 능력자가 건드리는 물리량의 종류와 개수를 역산하고, 이 값을 시행 전후로 비교해 승급 여부를 판정하려는 것이 설계 의도였다.
기준선기는 계획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성공한 부분이다. 세 차례 시행에서 축적된 대가 계측 자료는 계획 종결 이후에도 계속 쓰였고, 1970년대 초 SIGMA 척도가 제어 물리량 개수를 등급 기준으로 채택하는 데 직접적인 근거가 되었다. 계획이 증명하려던 것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계획이 측정하려고 만든 자는 표준이 되었다.
7.2. 포화기 [편집]
기준선기 종료 후 약물 투여가 시작된다. 사용된 약물은 환각 유발 계열, 각성제 계열, 항콜린성 계열의 세 축이었고, 투여량은 통상 임상 용량의 수 배에서 수십 배에 달했다. 투여 목적은 주관현실의 비중을 키우는 것이었다. 신비가 주관현실과 객관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면, 주관 쪽을 부풀리면 충돌면이 넓어지리라는 논리다.
포화기의 특징은 동시에 걸려 있던 대사 지원이다. 능력 사용이 뇌의 에너지 소비를 평상시의 서너 배에서 일곱 배까지 끌어올리고 혈당을 급격히 태운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으므로, 피실험자에게는 고농도 포도당이 정맥으로 지속 투여되었고 체온과 수분이 상시 관리되었다. 그 결과 피실험자는 탈진으로 발동이 중단되는 자연스러운 제동 없이 며칠씩 연속으로 능력을 쓰도록 강요될 수 있었다. 계획이 인체에 가한 가장 근본적인 조작은 약물이 아니라 이 제동의 제거였다는 평가가 있다.
7.3. 박탈기 [편집]
포화기와 겹쳐서 감각 박탈이 시작된다. 피실험자는 차광, 차음, 체온과 같은 온도의 부력 용액을 갖춘 밀폐 탱크에 수용되었다. 제1차 시행에서는 72시간 단위로 끊어서 시행했으나, 제2차에서 연속 11일, 제3차에서 연속 31일로 늘어났다.
이 단계의 이론적 근거는 포화기와 같다. 객관현실의 입력을 끊으면 주관현실의 상대적 비중이 커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랐다. 감각 박탈이 장기화되면 의식적 연산이 먼저 붕괴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출력과 범위와 지속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이 사라지면서, 무의식 연산만 남은 상태가 된다. 계획은 이 상태를 주관현실이 우세해진 상태로 오독했고, 실제로는 능력자가 자기 능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7.4. 부하기 [편집]
계획의 핵심 단계다. 박탈 상태를 유지한 채 피실험자에게 한계 출력의 지속 발동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두개골 외부에서 전기 자극을 가한다. 자극 부위는 측두엽과 두정엽 사이 그리고 전전두엽으로, 능력자의 뇌에서 구조적 차이가 확인된 영역들이다. 현대의 경두개 자극과 원리는 같으나 출력 조절이 조악했고, 시행 기록에는 자극 중 경련이 유발된 사례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부하기의 목표는 문턱을 넘기는 것이었다. 계획 문서는 이 순간을 도약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세 차례 모두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기는 했다. 대가 계측값이 기준선기 대비 급격히 흐트러지고, 능력의 형태가 일시적으로 불명확해지는 구간이 관측된다. 오늘날의 해석으로는 이것이 묶음이 풀리는 구간이다. 계획은 이것을 도약의 전조로 판독했다.
7.5. 모의 사망 체험 [편집]
제2차 시행부터 추가된 절차다. 자연발현이 극한 상황이나 외상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는 관찰에서 도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익수 유도와 저산소 노출이 사용되었고, 피실험자에게는 사전에 고지되지 않았다. 마클리의 유고는 이 절차의 도입 회의에서 의료진 세 명이 반대했으며 그중 두 명이 이후 계획에서 배제되었다고 적고 있다.
모의 사망 체험은 계단 계획이 남긴 절차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이다. 오늘날 일부 국가가 시행하는 강제 각성 절차의 네 가지 구성 요소 — 경련을 유발할 수준의 고강도 전기 충격, 향정신성 약물 과다 투여, 72시간 이상의 감각 박탈, 모의 사망 체험 — 는 계단 계획 프로토콜의 네 단계와 사실상 일대일로 대응한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계획의 수단은 살아남아 표준이 되었다. 초상사에서 이 계획이 가장 악명 높은 사업으로 불리는 이유의 절반은 이 계승에 있다.
7.6. 중단 기준 [편집]
계획서에는 중단 기준이 세 줄로 적혀 있다. 생체 징후가 소생 불가능 수준으로 저하될 때, 시설 안전이 위협받을 때, 그리고 운영위원장이 중단을 지시할 때다. 의료 책임자의 판단으로 중단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마클리가 1963년에 제출한 의견서의 요지가 바로 이 조항의 신설이었고, 기각되었다.
세 기준은 모두 사후적이다. 즉 무엇인가가 이미 일어난 다음에야 작동한다. 계획이 진행 중에 스스로를 멈출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은 내부 조사에서도 지적되었지만, 그 지적이 계획 종결 이후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같은 문제의 일부였다.
8. 시행 [편집]
8.1. 제1차 시행 [편집]
제1차 시행은 1961년 8월 18일 개시되었다. 기준선기는 그 전 2주간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포화기와 박탈기가 동시에 시작되었고, 부하기는 5일차에 진입했다.
7일차인 8월 24일, 제1계단은 부하기 진행 중 사망했다. 사인은 기록마다 다르게 적혀 있다. 의무 기록 원본을 인용한 사본은 광범위한 조직 손상을 동반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적고 있고, 종결 보고서는 고열에 의한 순환 허탈로 요약했다. 두 기술이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열 계통 능력자가 통제를 잃고 자기 신체 내부의 열에너지 분포를 조작하면 체내에서 국소적인 과열이 일어나며, 이는 바깥에서는 발열과 순환 허탈로 관측되고 안에서는 조직 손상으로 나타난다.
시행 종료 시점의 시설 피해는 없었다. 능력이 외부로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당시 계획에 유리하게 해석되었다. 실패의 결과가 피실험자 본인에게만 미친다는 것은 계획이 통제 가능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8.2. 제1차 이후의 수정 [편집]
내부 분석은 실패 원인을 피실험자의 통제력 부족으로 결론지었다. 즉 도약의 순간에 능력을 붙들고 있을 힘이 부족해서 능력이 안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 진단에 따라 세 가지가 수정되었다. 첫째, 피실험자 선정에서 발현 훈련 과정 이수 여부를 최우선 항목으로 올렸다. 둘째, 박탈기를 짧게 끊지 않고 길게 이어가기로 했다. 셋째, 모의 사망 체험을 도입했다.
세 수정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제1차의 실패가 자극이 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전제다. 실패를 근거로 강도를 높이는 이 판단은 계단 가설의 구조에서 논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문턱을 넘지 못했다면 밀어붙이는 힘이 모자란 것이므로 더 세게 밀면 된다. 가설이 틀렸을 가능성은 검토 항목에 없었다.
8.3. 제2차 시행 [편집]
제2차 시행은 1962년 10월 4일 개시되었다. 제1차보다 1년 이상의 간격이 있었던 것은 선정 재검토와 장비 보강 때문이었다. 박탈기가 연속 11일로 늘어났고, 부하기는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되었다.
제2계단은 41일차인 1962년 11월 13일 사망했다. 시행 기록에 따르면 사망 전 나흘 동안 능력의 형태가 안정적으로 관측되지 않았고, 대가 계측값이 전기 계통과 무관한 물리량 쪽에서 나타나는 이례적인 구간이 세 번 기록되었다. 계획은 이 관측을 도약이 임박한 증거로 해석하고 부하를 유지했다. 오늘날의 해석은 정반대다. 묶음이 풀리면서 조작 대상이 원래 계통 바깥으로 흩어진 것이며, 그 시점에 부하를 중단했다면 재고정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인은 심정지로 기록되었다. 다만 소생 시도 중 의료진 두 명이 감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망 직전까지 통제되지 않은 전기 조작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4. 마클리 의견서 [편집]
제2차 시행 종료 직후인 1962년 12월, 의무 책임자 마클리는 계획 중단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운영위원장에게 제출했다. 유고에 실린 초안 기준으로 의견서의 논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두 차례의 시행에서 관측된 것은 승급의 전조가 아니라 능력 구조의 해체이며, 해체가 어디까지 진행되는지에 관해 계획은 아무 예측도 갖고 있지 않다. 둘째, 실패의 결과가 피실험자 본인에게 국한된다는 판단은 두 사례에서 귀납된 것일 뿐 근거가 없으며, 계통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셋째, 의료 책임자가 시행을 중단시킬 권한이 계획서에 없다.
의견서는 1963년 1월 기각되었다. 회신은 남아 있지 않고, 유고에는 구두로 전달된 기각 사유가 "두 건의 사례로 방법을 폐기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고 적혀 있다. 마클리는 사임하지 않고 제3차 시행에 참여했다. 유고의 해당 대목에는 남아 있으면 멈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문장이 있고, 그 아래에 한 줄이 덧붙어 있다. 멈추지 못했다.
8.5. 제3차 시행 [편집]
제3차 시행은 1963년 8월 23일 개시되었다. 피실험자는 최상위 군집에 속한 벡터 계통 능력자였고, 프로토콜은 세 차례 가운데 가장 강도가 높았다. 박탈기는 연속 31일에 달했으며, 부하기는 9월 말부터 사실상 상시 유지되었다.
제2계단에서 관측되었던 계통 바깥의 대가 계측값은 제3차에서 훨씬 이른 시점에, 훨씬 큰 폭으로 나타났다. 56일차 이후의 기록에는 벡터 계통에서 설명되지 않는 열역학적 이상과 국소 기압 변동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계획은 이를 최상단 접근의 신호로 판정했고, 10월 말 운영위원장에게 도약 임박을 보고했다. 이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11월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 계획을 즉시 중단시킬 수 있는 정치적 여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9. 1963년 11월 9일 [편집]
9.1. 발단 [편집]
79일차인 1963년 11월 9일 오전, 계획은 부하기의 최종 국면에 들어갔다. 기록상 마지막으로 정상 계측된 시각은 오전 9시 40분경이다. 이후 30분 동안 계측 장비 대부분이 판독 불가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장비 고장이 아니라 계측 대상이 동시에 너무 많은 물리량에 걸쳐 변동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지하 2층에 있던 인원의 증언 가운데 유출 자료에 남은 것은 두 건뿐이다. 두 증언 모두 소리가 아니라 방향에 관해 말하고 있다. 떨어뜨린 물건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거나, 문을 밀었는데 문이 같은 힘으로 밀려 나왔다는 식이다. 벡터 계통 능력자가 통제를 잃었을 때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 운동량 벡터의 무작위 반전이라는 오늘날의 이해와 일치한다.
9.2. 붕괴 [편집]
구조 붕괴는 오전 10시 20분경 시작되었다. 붕괴의 양상은 통상적인 건축물 붕괴와 달랐다. 하중은 아래로 작용해야 하는데, 지하 2층 천장 구조재의 하중 벡터가 국소적으로 반전되면서 구조물이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 상부 슬래브를 뚫었고, 그 반작용으로 지지 구조가 동시에 무너졌다. 붕괴는 지하 3층까지 이어졌다.
지상에서 관측된 것은 폭발이었다. 실제로 폭발물은 사용되지 않았고 연소 흔적도 없었으나, 사고 직후 작성된 공군 측 1보는 연료 저장 설비의 폭발로 기재되었다. 이 1보는 정정되지 않은 채 공식 기록으로 남았다.
9.3. 제압 [편집]
제압에는 68시간이 걸렸다. 11월 9일 오전부터 11월 12일 새벽까지다. 초기 대응은 전면 실패했다. 경비 인원이 시도한 사격은 모두 무의미했는데, 운동량을 가진 물체는 그대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초기 사상자 대부분이 이 국면에서 발생했다.
제압에 사용된 방법은 벡터 계통의 한계를 겨냥한 것이었다. 운동량을 가진 물체만 반사할 수 있으므로, 열과 방사선, 그리고 무엇보다 산소 결핍에는 대응하지 못한다. 시설 잔존 구역이 밀폐된 뒤 산소 농도가 단계적으로 낮춰졌고, 피실험자가 의식을 잃으면서 간섭장 발산이 멎었다. 능력은 능력자가 의식을 유지하는 한 항상 발산되며 의식이 끊기면 함께 끊긴다는 사실이 실전에서 확인된 첫 사례로 기록된다.
이 68시간의 경험은 이후 능력자 제압 교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계통별 취약점을 사전에 파악하고 물리적 제압 대신 의식 차단을 우선하는 현재의 표준은 이때 만들어졌다.
9.4. 피해 [편집]
인명 피해는 사망 11명, 부상 23명으로 집계된다. 사망자는 연구 인원 6명, 경비 4명, 의무 1명이다. 임상 총괄 앨콧이 사망자에 포함되어 있고, 마클리는 지하 3층에서 부상자를 대피시키던 중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전원의 사인은 공식 기록상 시설 사고로 처리되었다. 유족에게는 고고도 생리학 연구 시설의 화재로 통보되었고, 시신 대부분은 확인되지 않은 채 매장 절차가 진행되었다. 이 처리 방식은 초상 연구 시설의 사고에서 관행적으로 반복되었다.
시설은 복구 불가 판정을 받고 폐쇄되었다. 지하 구역은 매립되었으며, 지상 설비는 1965년까지 철거되었다. 현재 이 위치에 남아 있는 것은 출입 금지 표지와 관리되지 않는 도로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10. 종결 [편집]
10.1. 내부 조사 [편집]
사고 직후 SIGMA 운영위원회는 내부 조사반을 구성했다. 조사는 1963년 11월 하순부터 1964년 2월까지 진행되었고, 조사 대상은 계획의 타당성이 아니라 사고의 경위와 보안 유지 여부로 한정되었다. 조사반이 제출한 권고 사항 일곱 건 가운데 여섯 건이 시설 설계와 대응 절차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한 건이 "가설의 재검토"였다.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 하나가 뒷날 반복해서 인용된다. 제3차 시행의 56일차 이후 기록을 검토한 조사반은, 같은 자료가 승급의 접근이 아니라 능력 구조의 해체로도 똑같이 읽힌다는 점을 지적했다. 두 해석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데 필요한 것은 추가 관측이 아니라 가설을 의심할 의사였다는 것이다.
10.2. 1964년 종결 보고서 [편집]
종결 보고서는 1964년 3월 30일 제출되었다. 보고서의 결론은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최상단에 인위적으로 도달시키는 것은 현재의 방법으로 불가능하다. 시행 중 관측된 현상은 승급으로 해석될 수 없다. 계획을 종결한다.
그러나 보고서는 가설 자체를 폐기하지 않았다. 최상단의 존재 가능성은 부정되지 않았고, 불가능하다는 판단에는 현재의 방법으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 단서 때문에 축적된 기록은 실패한 사업의 잔여물이 아니라 후속 연구의 자산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시행 기록 원본 4,180쪽은 폐기되지 않고 이론 자료로 재분류되어 SIGMA 문서고에 남았다.
10.3. 인적 처분 [편집]
홀브룩은 1964년 4월 계획 책임에서 해임되었으나 SIGMA에서 배제되지는 않았고, 이론분과 고문 직함으로 1969년까지 자문에 응했다. 그가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계단 계획에 관해 어떤 견해를 남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970년대 초 SIGMA 척도 개발 회의의 참석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 있고, 이 주장의 근거가 된 문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
운영위원장 랜들은 1965년 다른 직위로 이동했다. 보안 책임자 브리스코는 1964년 예편했다. 마클리는 1964년 3월 사임했고, 이후 민간 병원에서 신경과의로 일하다가 1996년 사망했다. 그녀가 사임 시 반출한 개인 기록이 유고의 원본이다.
계획에 참여한 인원 가운데 형사 책임을 진 사람은 없다. 사고 자체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책임을 물을 절차가 성립하지 않았다.
10.4. 시설 폐쇄 [편집]
할로 크릭 시설의 폐쇄는 예산 문서상 기상 관측 체계 개편에 따른 파견대 해체로 처리되었다. 시설에 배속되어 있던 인원 가운데 계획의 목적을 고지받지 않았던 다수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고, 전출 시 비밀 유지 서약이 갱신되었다. 1988년 의회 감사에서 계단 계획의 존재가 문서로 확인되었을 때 감사관이 접촉할 수 있었던 생존자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했고, 따라서 이들의 증언은 시설의 존재는 확인해 주었으나 내용에 관해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11. 제3계단의 격리 [편집]
11.1. 시더 게이트 이송 [편집]
제압된 피실험자는 1963년 11월 12일 의료 격리 시설로 이송되었다. 이 시설은 유출 자료에서 시더 게이트라는 명칭으로만 확인되며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송은 항공편으로 이루어졌고, 이송 중 의식 회복을 막기 위한 약물 투여가 계속되었다.
이송 시점에 계획의 관심사는 이미 실험이 아니라 수용이었다. 제압에 68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이 인물을 깨워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고, 능력 발동을 차단하는 설비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11.2. 유지 절차 [편집]
채택된 방법은 지속적인 의식 차단이었다. 간섭장은 능력자가 의식을 유지하는 한 항상 발산되고 능력은 그 반경 안에서만 작용하므로, 의식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능력도 발동하지 않는다. 약물로 유도한 혼수 상태를 무기한 유지하는 이 방식은 사실상 영구적인 의식 박탈이며, 계획 문서에는 유지(maintenance)라는 한 단어로만 기재되어 있다.
이 절차는 이후 격리 관리 체계의 원형이 되었다. 현재 4급 이상 또는 위험 계통으로 분류된 능력자가 공식 기록상 사망 처리된 뒤 전용 시설에 수용되고 상시 감시와 억제 설비 아래 놓이는 관리 방식은, 계단 계획이 사고 대응으로 급조한 이 임시 조치에서 출발했다. 1970년대 이후 능력 억제 장치가 개발되면서 완전한 의식 차단은 표준에서 빠졌으나, 억제 장치의 설계 목표 자체가 의식을 유지한 채로 같은 효과를 얻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계보는 이어진다.
11.3. 생사 문제 [편집]
제3계단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1996년 마클리 유고에는 1970년대 초까지 유지 중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1980년대 중반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리 대상 목록 사본에 1960년대 등록번호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2018년 UBATM 창설 당시 미국이 제출한 격리 대상 등록 자료에 1960년대에 부여된 번호가 하나 남아 있었다는 주장도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어느 것도 원본으로 확인된 바 없다.
생존해 있다면 2020년대 기준으로 여든을 넘긴 나이다. 초상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계속 거론되는 것은 한 사람의 생사 때문만은 아니다. 계단 계획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업이고, 그 사업의 피실험자 역시 공식적으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면, 존재하지 않는 계획이 60년 넘게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12. 유산 [편집]
12.1. SIGMA 척도 [편집]
가장 크고 가장 역설적인 유산이다. 1970년대 초 SIGMA가 도입한 6단계 척도는 두 가지를 계단 계획에서 물려받았다. 하나는 기준으로, 제어 물리량의 개수라는 발상은 계단 계획의 기준선기에서 수행된 대가 계측 방법론의 직계다. 다른 하나는 칸의 수로, 여섯이라는 숫자는 계측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계단 가설이 상정한 여섯 군집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계단 계획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한 바로 그 데이터가 오늘날 모든 능력자에게 붙는 번호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은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더 나아가, 척도가 도입되면서 등급이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측되는 것이라는 이해가 정착한 것도 계단 계획의 실패 덕분이었다. 계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세 사람이 필요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6급이 척도에 정식 등급으로 편입되지 않고 이론상의 단계로 남아 있는 이유다. 계측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지만, 계단 계획 이후 SIGMA 내부에서 최상단을 정식 등급으로 올리자는 제안이 두 차례 부결되었고 부결 사유가 실무적 고려가 아니었다는 기록이 있다. 등급표에 빈칸을 만들어 두면 누군가 반드시 채우려 한다는 것이었다.
12.2. 강제 각성 절차 [편집]
앞서 적었듯 오늘날 일부 국가가 시행하는 강제 각성의 네 요소는 계단 계획 프로토콜과 사실상 일대일로 대응한다. 다만 목적과 대상이 다르다. 계단 계획은 이미 각성한 고위 능력자를 더 위로 올리려 했고, 강제 각성은 발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각성시키려 한다.
이 차이 때문에 결과도 갈렸다. 아직 묶음이 고정되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자극을 가하면 도달률이 실제로 올라간다. 강제 각성의 3급 이상 도달률이 정규 훈련 과정보다 현저히 높은 것은 이 때문이며, 동시에 정신 질환과 뇌 손상, 그리고 낮지 않은 사망률이 따라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계단 계획의 방법이 각성에는 부분적으로 유효하고 승급에는 전혀 무효하다는 사실은, 묶임이 고정되기 전과 후가 전혀 다른 상태라는 현재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한 경험적 근거로 인용된다.
12.3. 격리 관리 체계 [편집]
제3계단의 수용을 위해 급조된 조치가 제도가 된 경위는 앞에서 서술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이 제도가 계획의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계단 계획 이후 각국이 도입한 조치는 능력자를 더 안전하게 다루는 방법이 아니라 능력자로부터 더 안전해지는 방법이었다. 억제 설비, 계통별 제압 교리, 공식 기록상의 사망 처리, 24시간 감시가 모두 그렇다. 피실험자 보호에 관한 절차, 예컨대 의료 책임자의 중단 권한 같은 것은 계획 종결 이후에도 오랫동안 도입되지 않았고, 최소 기준이 명문화된 것은 2018년 UBATM 창설 이후다.
12.4. 5월 계획과의 관계 [편집]
1980년대 미국에서 시행된 5월 계획은 계단 계획의 직계 후속으로 평가된다. 특정 능력자의 발동 패턴을 분석해 다른 인간의 신경계에 강제로 이식하려 한 이 실험은, 능력을 올릴 수 없다면 옮기면 된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계단 계획이 남긴 단서 — 현재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 가 20년 뒤 다른 방법의 탐색으로 이어진 셈이다.
5월 계획 역시 실패했고, 이식을 받은 피실험자들은 예외 없이 심각한 신경계 손상을 입었다. 다른 점은 결말이었다. 5월 계획의 피실험자가 교도소 수형자였다는 사실이 1988년 의회 일부 의원들에게 알려지면서 SIGMA 전체가 감사를 받았고, 계단 계획의 존재가 문서로 확인된 것도 이 감사 과정에서였다. 두 계획을 나란히 놓고 보면 능력은 올릴 수도 옮길 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후 각국의 연구가 능력자를 관리하거나 기계로 우회하는 방향으로 갈라진 것은 이 두 번의 실패를 모두 치른 뒤였다.
12.5. 유폭 실험과의 대비 [편집]
같은 시기 소련이 진행한 유폭 실험은 계단 계획과 자주 나란히 놓인다. 두 계획은 목표가 정반대였다. 계단 계획은 능력자를 더 높은 단계로 올리려 했고, 유폭 실험은 능력자를 한계 너머로 밀어붙여 붕괴시킨 뒤 그 순간의 에너지를 회수하려 했다. 미국은 능력자를 자산으로 키우려 했고 소련은 소모품으로 쓰려 했다는 대비가 통상적인 요약이다.
그러나 두 계획이 도달한 지점은 비슷했다. 양쪽 모두 묶음이 풀리는 구간을 관측했고, 양쪽 모두 그 구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어하지 못했다. 차이는 해석에 있었다. 미국은 그 구간을 목표로 가는 길목으로 보았고 소련은 그 구간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쓸 만한 산출을 남긴 쪽은 소련이었다. 붕괴 직전 간섭장이 극도로 농축된다는 유폭 실험의 관측은 1980년대 간섭장 응축제의 이론적 출발점이 되었고, 계단 계획은 척도와 절차를 남겼을 뿐 물질을 남기지는 못했다.
두 계획의 인명 피해를 비교하는 서술은 자주 인용되지만 신뢰도가 낮다. 유폭 실험은 1969년과 1971년 두 차례의 시설 사고로 연구진이 전멸했고, 계단 계획은 피실험자 3명과 사고 사망 11명이 공식 집계다. 그러나 유폭 실험 쪽 피실험자 수는 어떤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13. 규명과 논쟁 [편집]
13.1. 1974년 교정쇄 [편집]
계단 계획에 관한 최초의 외부 언급은 1974년 프랑스 남부 비밀 시설에서 유출된 교정쇄에 있다. 연구원 두 명이 시설 관련 문서를 빼돌려 언론사에 전달하려다 인쇄 직전에 저지된 사건에서, 몇 부의 교정쇄가 외부로 새어 나갔다.
교정쇄에는 계획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미국에서 최상위 능력자를 대상으로 한 승급 실험이 1960년대 초에 시행되었고 시설 사고로 종결되었다는 서술이 두 문단에 걸쳐 나온다. 프랑스가 이 정보를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두 문단은 이후 수십 년 동안 계단 계획에 관한 유일한 문헌적 근거였고, 1988년 이전에 이 계획을 언급한 모든 자료는 사실상 이 교정쇄의 재인용이다.
13.2. 1988년 의회 감사 [편집]
1988년 SIGMA 감사는 5월 계획 때문에 시작되었다. 감사 범위는 1975년 이후의 사업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감사관이 문서고 목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964년에 이론 자료로 재분류된 대량의 기록이 발견되었고 그 표제에 계획명이 남아 있었다.
감사관은 이 기록의 열람을 요청했으나 감사 범위 밖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최종 보고서 본문에는 계단 계획에 관한 서술이 없고, 부록의 미조사 사항 목록에 계획명과 연도, 그리고 앞서 인용한 한 문장이 남았다. 이 부록이 계단 계획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공식 문서다.
감사 자체는 계단 계획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부록에 이름이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의 모든 논의가 가능해졌다. 1974년 교정쇄가 이름 없는 사건을 전했다면, 1988년 부록은 이름을 주었다.
13.3. 마클리 유고 [편집]
마클리는 1996년 사망했다. 그녀가 1964년 사임하면서 반출한 개인 기록 — 일지, 의견서 초안, 선정 기준 목록, 회의 메모 — 은 유족이 보관하다가 2011년 공개했다. 분량은 사본 기준 300여 쪽이다.
유고는 계단 계획에 관해 알려진 구체적 사실의 대부분을 제공한다. 선정 기준 여섯 번째 항목, 모의 사망 체험 도입 회의의 반대와 배제, 중단 권한 신설 요구와 기각, 제3계단의 유지 상태에 관한 언급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동시에 유고는 신빙성 논란의 중심이기도 하다. 원본과 대조할 수 있는 공식 문서가 존재하지 않고, 기록 일부가 사임 이후에 가필된 흔적이 있으며, 날짜가 어긋나는 대목이 여러 곳 있기 때문이다.
이 구도는 루이나의 스틸워터 계획이 1993년 전직 실무 책임자의 증언으로 알려졌을 때의 상황과 거의 같다. 문서를 제시하지 못하는 증언이 사실상 유일한 내부 자료가 되고, 그 때문에 증언의 신빙성 논란이 계획의 실재 여부 논란을 대체해 버리는 구조다. 초상사 연구에서 이 구조는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조건에 가깝다.
13.4. 소련의 사전 인지 [편집]
2005년 핀란드 회동에서 소련 측 실무 책임자가 계단 계획을 그 명칭으로 언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국 측 참석자들에게 이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획명이 외부에 확인된 것은 1988년 부록이 처음이고 그것도 공개 문서가 아니었으므로, 소련이 명칭을 알고 있었다면 경로는 1960년대의 침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정보가 소련에 언제 넘어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소련이 계단 계획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같은 방식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소련이 유폭 실험에 자원을 집중한 이유가 계단 계획의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고, 반대로 1966년에 시작된 유폭 실험이 계단 계획의 결과를 알기 전에 이미 설계되었으므로 인과를 뒤집을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13.5. UBATM 소위원회 [편집]
2018년 UBATM이 창설되면서 과거 실험의 책임 문제는 별도 소위원회로 넘어갔다. 소위원회에 회부된 사건은 창설 당시 기준 11건이며, 계단 계획은 그중 가장 오래된 사건이다.
소위원회는 지금까지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결론을 내지 않았다. 계단 계획의 경우 절차적 난점이 특히 크다. 책임을 물을 대상이 모두 사망했고, 피실험자 세 명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며, 원본 기록의 존재 자체를 보유국이 확인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원회가 요구한 문서 제출 항목 가운데 계단 계획 관련은 세 차례 모두 보류되었다.
이 정체 상태는 UBATM 비판론의 단골 근거다. 학대에 관한 최소 기준을 세우겠다는 기구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명백한 사례에 대해 60년이 지나도록 아무 판단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 기준은 앞으로의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과거는 사실상 면책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13.6. 계단이라는 은유 [편집]
계단 계획에 관한 서술은 대개 같은 지점으로 수렴한다. 이 계획을 움직인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은유였다는 것이다.
능력의 강도를 계단이라고 부르는 순간, 여러 가지가 따라 나온다. 계단에는 방향이 있으므로 올라가는 것이 좋은 일이 된다. 계단에는 칸이 있으므로 다음 칸이 반드시 존재한다. 계단에서 미끄러지면 원래 칸에 남으므로 실패는 회복 가능하다. 이 셋 가운데 어느 것도 검증된 적이 없지만, 세 전제 모두 계획서 어디에도 전제로 적혀 있지 않다. 은유에 이미 들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이해로 보면 적절한 은유는 계단이 아니라 목록이다. 능력자는 몇 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개를 쥐고 있으며, 더 쥐려면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 놓는 순간이 어떤 것인지는 세 사람이 보여주었다. 계획이 도약이라고 기록한 구간은 도약이 아니라 놓는 구간이었고, 계획은 그 구간에서 부하를 유지함으로써 세 번 모두 같은 결과에 도달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제3계단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해서는 아직 결론이 없다. 68시간의 제압 기록에 남은 현상들은 벡터 계통 하나로 설명되지 않으며, 일부 연구자는 묶음이 풀린 뒤 더 많은 요소를 포함한 채 다시 고정되었을 가능성, 즉 계획이 목표한 승급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해석이 맞다면 계단 계획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했고, 성공했기 때문에 재앙이 되었다. 의식적 연산이 따라가지 못하는 승급은 더 강한 능력자가 아니라 더 큰 사고를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기록이 폐기되지 않은 이유를 여기서 찾는 견해도 있다. 1964년의 종결 보고서가 가설을 폐기하지 않고 현재의 방법으로라는 단서만 남긴 것은, 보고서를 쓴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는지에 관한 간접적인 증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확인할 방법은 없다.
14. 관련 문서 [편집]
[1] 루이나의 스틸워터 계획이 대표적인 사례다. 스틸워터라는 단어는 계획 내용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제방이 막은 물을 잔잔히 유지한다"는 널리 알려진 독해는 사후에 붙은 것이다.[2] 이 등록부는 계측이 아니라 신고와 관찰에 의존했으므로 실제 발현자 수의 극히 일부만 담고 있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1급에 해당하는 미세 발현자는 아예 잡히지 않았고, 등록부의 1,140명은 대체로 2급 이상에 해당한다.[3] 1970년대에 계측 기준으로 재판정한 결과 이 아홉 명 가운데 실제로 5급에 해당한 인원은 세 명뿐이었다. 관찰 기반 판정이 상위 등급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3계단은 재판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